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세르게이 코롤료프 (문단 편집) === 이후 === 그의 사망 이후 코롤료프 설계국은 그의 부하였던 바실리 미신이 이끌어 코롤료프가 달성하려던 달탐사 계획을 계속 이어갔다. [[파일:external/709ed21b96b1ecc0ef0fe441f68438f50276c0be80a065c56310dc750adb4772.jpg]] 코롤료프의 후임으로 OKБ-1 (Опытное конструкторское бюро-1. 제1 설계국, 또는 코롤료프 설계국 ) 의 국장을 맡은 바실리 미신. 코롤료프 밑에서 부국장을 하다가 코롤료프 사후 승진했다.[* OKБ는 숫자대신 초대 원장 이름으로 불리기도 하며, OKБ-45가 유명한 [[수호이]] 설계국, OKB-155가 [[미그]](미코얀-구레비치) 설계국이다.] 소련에게는 불행하게도, 코롤료프와 달리 바실리 미신은 개인 연구자로서는 탁월했지만, 프로젝트 관리자로서는 능력이 부족했다. 나름 열심히 일했고, 그가 N-1 프로젝트 때 남긴 연구일지는 "미신 다이어리"라고 해서 현재 웹으로 공개되어 있으며. [[http://www.mishindiaries.com|링크]] 이것은 A-4용지로 총 천페이지 가까이 되는 방대한 것으로서, 그가 N-1프로젝트를 성공시키기 위해 얼마나 머리를 짜내 노력했는지는 이 노트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특히 코롤료프와 같은 관리능력은 갖지 못했으며, 성격도 개차반이었는지 [[유리 가가린]]이나 [[알렉세이 레오노프]]와 같은 우주비행사들과도 사이가 나빴다. 대기권 돌입시 낙하산이 펴지지 않아 코마로프가 희생된 소유즈 1호와 우주복 대신 체육복 차림으로 내려오다가 세명의 우주비행사가 순직한 11호 참사 때 조사보고서에서 그의 실책이 공식적으로 나열되었을 정도로 종합적인 관리능력이 부족했다. 특히 술을 너무 좋아하는게 탈이어서 [[니키타 흐루쇼프]]조차도 야인시절 펴낸 회고록에서 그를 깠을 정도. 결국 4번의 실패 외에도 술 때문에 거의 폐인이 된 상태에서 병원신세를 지다가 잘렸다. 그럼에도 꽤 장수해서 소련이 망한 지 10년후인 2001년 사망. 거대 프로젝트 과학에서 관리자로서의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여준 사례가 된 셈. 코롤료프가 개발하려 했던 [[N-1]]로켓은 설계상 새턴5보다 출력이 세긴 했지만, 1단이 무려 30개가 넘는 엔진을 달고 있었기 때문에 당시의 기술로 이를 조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고, 계속 폭발사고를 일으켜 4번의 실패를 했다.[* 반면에 미국의 새턴-5는 강력한 F1엔진 5개로 모든 추진력을 감당했다. 이는 미국의 재료과학 기술이 소련보다 훨씬 뛰어났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렇게 소련이 삽질을 하는 동안 1969년 새턴5 로켓을 이용한 미국의 [[아폴로 계획|아폴로 11호]]는 달 착륙에 성공했다. 소련도 어떻게든 달에 가보려고 했고, 1972년 N-1의 제4차 발사에서 실패한 후에도 N-1은 계속 개발되었으나, 1974년 [[레오니트 브레즈네프]]는 미국도 1972년 발사된 [[아폴로 17호]]를 끝으로 달탐사에 관심이 시들어진 것을 보고 소련의 달탐사는 별로 실익이 없다고 판단하여 아예 소련의 달 유인탐사 계획을 취소했다. 그리고 여러번 실패한 미신은 소련 우주개발 책임자에서 잘리고, 코롤료프 설계국의 국장으로는 아이러니하게도 코롤료프와 원수였던 글루시코가 부임한다. 한편, 우주선의 엔진을 전담하던 글루시코 설계국(이후 에르고마쉬로 이름을 바꿈)은 글루시코가 코롤료프 설계국을 맡고 있던 1980년대가 되어서야 라도프스키 (Radovsky) 국장 휘하에서, [[새턴 V]]의 F1엔진과 동등 내지 우월하고 달탐험에 필요한 출력을 얻는 [[https://en.wikipedia.org/wiki/RD-170|RD-170 엔진]]을 개발하게 된다. 그리고 1980년대에는 N1의 출력을 넘는 [[에네르기아]] 로켓을 개발하여 우주전투위성 [[폴류스]]와 비운의 우주왕복선 [[부란]]을 각각 한번 쏘아 올린다. 일부 [[밀덕]]들이 현재 막장상태인 러시아의 상황만 보고, 당시의 우주기술을 포함한 소련의 기술력이 별볼일 없었다는 식으로 주장하지만, 1980년대 시점에서는 적어도 3위 그룹 (유럽, 일본, 중국)[* 중국이 우주개발에 대한 투자를 의욕적으로 늘리고는 있지만, 여러가지 운영 상황은 아직까지는 소련의 1980년대 수준보다도 낮으며, 소련이 붕괴한 후 20년이 훨씬 넘는데도 우주기술 3위의 중국이 20-30년전의 소련 레벨이하라는 것은 소련이 그만큼 대단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물론 우주개발도 경제력이니만큼 현재의 상태가 20-30년간 계속된다면 장기적으로는 중국이 러시아를 앞설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사실 당시 미소는 국가 자존심을 건 [[우주 경쟁]] 때문에 경제를 생각하지 않고 과도하게 우주기술 개발에 매달린 탓에 비정상적으로 기술 개발속도가 빨랐다. 그렇게 보면 자기 경제력에 맞게 수십년에 걸친 장기 계획을 세워 우주개발을 하는 중국이 정상적이다.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돈을 퍼붓던 냉전 이후 미소 모두 예산 삭감크리를 맞아 러시아는 소련 시절의 라인업을 업그레이드하는 수준에 머무르고 있으며, 미국도 우주왕복선 퇴출 및 차세대 발사체 개발이 계속 연기-변경되는 처지이다.]과 넘사벽으로 차이가 나는 세계 2위는 되었고, 미국에 비해 앞선 것도 상당히 많았다. 부란의 경우는 당시 미국도 리스크가 커서 못하던 무인우주비행을 실시했고, 우주정거장 살류트와 미르 운용 같은 일도 미국이 못하던 일이었는데[* 기술적으로는 가능했겠지만 챌린저 참사로 예산이 싹싹 썰려나간데다 [[SDI]]도 망해서 도저히 수지를 맞출 수가 없었다.] 소련은 미국의 몇분의 일 비용으로 이를 이루어냈는데, 이 또한 당시 소련의 앞선 기술력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커다란 단일체의 스카이랩과 비교하여 미르라는 혁신적인 모듈형 우주정거장은 미국에 비해 부족한 소련의 예산과 기술력으로도 중요한 성과를 내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현재도 소련시절 개발된 러시아제 RD-180엔진(위에서 언급한 RD-170의 연소실을 2개로 줄인 모델) 을 군용으로[* 정확히는 [[ULA]]의 아틀라스 V 메인 엔진인데, 아틀라스의 주요 업무가 군사위성이나 가끔 NASA, NOAA 탐사선 쏘는 거다.] 계속 수입하고 있다. [[http://www.executivegov.com/2016/05/hasc-oks-purchase-of-18-rd-180-rocket-engines-as-amendment-to-2017-ndaa/|기사]] 여러 성과와 소련 붕괴 이후 30년이 넘게 지난 지금의 현황에서 볼 수 있듯이 소련의 항공우주기술 만큼은 적어도 붕괴 시점까지 미국과 선두를 다투었다 할 수 있다. 글루시코는 비록 코롤료프와 사이는 매우 나빴지만, 그의 [[우주정거장]] 개념을 발전시켰으며, 그의 지도 아래서 코롤료프 설계국은 [[살류트]]와 [[미르]]를 제작하여 소련은 우주정거정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이른다. [[ISS]]의 여러 운영 노하우도 이런 소련의 우주정거장 노하우를 상당히 이어받은 것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